취병 조형 유허비
기본정보
취병 조형(翠屛 趙珩)의 아버지인 조희보(趙希輔)가 광주목사(1606-1611)로 재직할 때 부인이 출산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법도로 관아에서 출산을 할 수 없어 칠굴재 박창우(七掘齋 朴昌禹)의 집에 산실(産室)을 정하고 출산을 하게 되니, 조형은 1606년 10월 20일 술시(戌時)에 이곳에서 출생하여 1611년까지 광주에서 자랐다.
취병 조형(1606-1679)은 현종 때의 문신으로 자는 군헌(君獻), 시호는 충정(忠貞),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40여 년 간 관직에 있으며, 도승지 대사헌을 지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일본 통신사로 1665년 4월에 한양을 떠나 이듬해 2월에 돌아와 일본여행의 전말(顚末)을 기록한 “부상일기(扶桑日記)”는 17세기 한일관계사의 중요자료로 평가된다.
조형의 6세손 조운한(趙雲漢)이 광주목사(1872-1874)에 부임하여 박창우의 자손을 찾아 조형의 출생지를 확인해보니 호남의 선비들이 추앙하는 박창우가 학문을 닦던 옛집이었다. 그러나 후손은 안청리(安淸里)로 이사하고, 유허지에 1873년 5월 13일에 비를 세웠다.
이 유허비는 화강석 1매를 이용하여 비의 지붕과 몸체를 동시에 조성하였으며, 기단석은 별개로 되어 있다. 형태는 높이가 너비보다 짧고 지붕석의 처마가 심한 반전을 이루어 형태면에서는 그리 우수하지 않다. 지금의 유허비는 이곳이 택지개발로 인하여 당초에 있었던 곳에서 북동쪽으로 50 여 미터 옮겨진 것이다.
<출처 : 광주광역시>
취병 조형(1606-1679)은 현종 때의 문신으로 자는 군헌(君獻), 시호는 충정(忠貞),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40여 년 간 관직에 있으며, 도승지 대사헌을 지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일본 통신사로 1665년 4월에 한양을 떠나 이듬해 2월에 돌아와 일본여행의 전말(顚末)을 기록한 “부상일기(扶桑日記)”는 17세기 한일관계사의 중요자료로 평가된다.
조형의 6세손 조운한(趙雲漢)이 광주목사(1872-1874)에 부임하여 박창우의 자손을 찾아 조형의 출생지를 확인해보니 호남의 선비들이 추앙하는 박창우가 학문을 닦던 옛집이었다. 그러나 후손은 안청리(安淸里)로 이사하고, 유허지에 1873년 5월 13일에 비를 세웠다.
이 유허비는 화강석 1매를 이용하여 비의 지붕과 몸체를 동시에 조성하였으며, 기단석은 별개로 되어 있다. 형태는 높이가 너비보다 짧고 지붕석의 처마가 심한 반전을 이루어 형태면에서는 그리 우수하지 않다. 지금의 유허비는 이곳이 택지개발로 인하여 당초에 있었던 곳에서 북동쪽으로 50 여 미터 옮겨진 것이다.
<출처 : 광주광역시>
문화재 등록정보
| 문화재 지정현황 | 유형문화재 제18호 |
|---|---|
| 문화재 제작연대 | 1873년(조선 고종 10) |
이용정보
| 이용시간 | 00:00 ~ 24:00 |
|---|---|
| 휴일 | 없음 |
| 버스정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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