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명' 검색
총
15
건
전체
제목
내용
[국가지정 문화재]
(전) 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
좋아요 3793
[국가지정 문화재]
(전) 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
광주천변에 위치한 광주공원은 성거산(聖居山)이라 불리웠다. 여기에 성거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절에 있던 5층 석탑이라 하여 전 성거사지 오층석탑이라 명했다. 고려시대에 세... 광주천변에 위치한 광주공원은 성거산(聖居山)이라 불리웠다. 여기에 성거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절에 있던 5층 석탑이라 하여 전 성거사지 오층석탑이라 명했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의 아랫부분은 단층이며, 이 위에 2단으로 나누어 5개의 돌을 맞추고 있다. 이는 이전에 볼 수 없던 고려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특색이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각 귀퉁이는 모두 약간씩 치켜 올려져 있다. 1961년에 석탑을 다시 고쳐 세울 때 2층 탑신에서 금동으로 만든 집 모양의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이 석탑과 관련하여 이야기 하나가 전해지고 있다. 성거산의 모양이 거북이처럼 생겨 지명도 구동(龜洞)으로 불리운다. 그런데 거북이가 광주를 떠나는 방향으로 가는 형세여서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거북의 등 위치에 성거사를 세우고 거북의 목 부근에는 5층석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당초에 석탑은 꼬리부분에 세우려 했으나 몇 번이고 무너지자 지나가는 승려가 움직이는 꼬리에 세우려하니 무너지는 것이라며 움직이지 못하게 목에 세워야 한다고 해서 현재의 자리에 세워졌다 한다. <출처 : 광주광역시>
좋아요 3793
[국가지정 문화재]
광주 자운사 목조아미타래여좌상 및 복장유물
좋아요 791
[국가지정 문화재]
광주 자운사 목조아미타래여좌상 및 복장유물
이 불상은 복장품에서 1388년 중수개금한 내용의 기문이 밝혀져 그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재료의 특성상 목제가 오랫동안 전래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고... 이 불상은 복장품에서 1388년 중수개금한 내용의 기문이 밝혀져 그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재료의 특성상 목제가 오랫동안 전래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고려시대에 조성된 목조 불상으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1276년에 제작된 개운사 목조 아미타불좌상을 비롯하여 수국사 목조아미타불좌상,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등 대체로 12세기 말에 제작되었다고 생각되는 일련의 목불좌상들과 같은 계열의 불상이다. 자운사의 복장전적은 대수구다라니(大隨求陀羅尼) 및 주금강경(注金剛經) 등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의미 있는 자료가 다수 있으며, 함께 발견된 복장조성기에 의해 복장이 조성된 절대연대가 확실하여 서지학 분야의 판본 연구는 물론, 불교학의 내용 연구와 미술사의 도상(圖像)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 복장 유물로 평가된다. 또한 섬유류의 유물이 존속하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기후·환경 조건 등을 고려할 때 자운사 복장직물의 역사적·민속적 가치가 크다. 1611년에 내장된 후령통(候鈴筒)과 팔엽연화(八葉蓮花), 오보병(五寶甁)도 일괄 부속품으로 함께 지정한다. <출처 : 광주광역시>
좋아요 791
[국가지정 문화재]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
좋아요 1155
[국가지정 문화재]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
광주광역시내에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2기의 탑 가운데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탑이 서있는 부근은 백주사(栢州寺)터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추정할 ... 광주광역시내에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2기의 탑 가운데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탑이 서있는 부근은 백주사(栢州寺)터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추정할 만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탑의 구성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형태로 신라석탑의 기본형을 잃지 않고 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는 여러 개의 돌을 짜맞추어 구성하였으며,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특히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1층은 5단인데 비해 2층부터는 4단으로 간략화되어, 양식상 만들어진 시대가 통일신라 후기로 내려옴을 알 수 있다. 1955년 해체, 수리할 때 4층 지붕돌 윗면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고 1961년에 다시 수리를 하여 일부 석재를 보완하였다. 광주 전남지방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5층석탑 가운데서도 우수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출처 : 문화재청>
좋아요 1155
[국가지정 문화재]
무등산 주상절리대
좋아요 2604
[국가지정 문화재]
무등산 주상절리대
주상절리는 용암이 식을 때 수축되어 생기는 절리 중에 단면의 형태가 오각형이나 육각형의 기둥모양인 것을 말한다. 무등산 주상절리는 약 7천 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서석대, 입석... 주상절리는 용암이 식을 때 수축되어 생기는 절리 중에 단면의 형태가 오각형이나 육각형의 기둥모양인 것을 말한다. 무등산 주상절리는 약 7천 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서석대, 입석대, 규봉이 대표적이다. 입석대, 규봉은 풍화가 많이 진행되어 기둥모양이지만 서석대는 풍화가 덜 진행되어 병풍모양을 하고 있다. 정상을 중심으로 산비탈에 있는 너덜겅은 이러한 돌기둥이 무너져 쌓인 것이다. 서있는 바위나, 너덜겅들은 암석의 생성과 풍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희귀한 자연유적이므로 서석대와 입석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문화재 정보] - 지정종목 : 천연기념물 제465호 - 지정연도 : 2005년 12월 16일 - 시대: 선사 - 수량/면적: 107,800㎡(지정구역) <출처: 한국관광공사>
좋아요 2604
[국가지정 문화재]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좋아요 480
[국가지정 문화재]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 증심사로 옮겨 온 것이다. 현재 광배(光背)와 대좌(...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 증심사로 옮겨 온 것이다. 현재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잃어버렸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 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높고 뚜렷하다. 눈·코·입 등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어서 온화하고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해준다. 전체적으로 신체는 두꺼운 옷에 싸여 있어서 굴곡이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무릎 너비와 적절한 비례를 이루고 있어서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가슴을 넓게 드러내고 있으며, 양 팔에 걸쳐진 두꺼운 옷자락은 규칙적인 평행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손 모양은 왼손이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쥔 형태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형식과는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에서 볼 때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통일된 균형미를 보이는 점이 우수하게 평가되며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광주광역시>
좋아요 480
[국가지정 문화재]
노인 금계일기
좋아요 610
[국가지정 문화재]
노인 금계일기
금계일기는 조선시대 학자인 금계(錦溪) 노인(魯認)(1566~1623)이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왜병에게 붙잡혀 일본에서 2년 동안 포로생활 하다가 명나라 사절단의 배로 도주... 금계일기는 조선시대 학자인 금계(錦溪) 노인(魯認)(1566~1623)이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왜병에게 붙잡혀 일본에서 2년 동안 포로생활 하다가 명나라 사절단의 배로 도주하여 북경을 거쳐 귀국하게 된 경위를 쓴 일기문이다. 보물 제311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진주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금계노인은 나주에서 태어나 17세에 진사시에 오르고 20세에 관직에 나갔다가 부모봉양을 위해 귀향한다. 27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모아 권율장군 휘하로 들어가 전쟁에 참여해 승리한다. 이후 정유재란 때 일본군 앞에서 부모를 지켜내 왜장을 감동시켰다. 왜장은 다른 왜병이 해치지 못하도록 ‘물해효자’라는 표식을 부여한다. 결국 일본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으나, 간신히 탈출하여 북경을 거쳐 귀국해 선조임금에게 일본의 사정과 복수책을 올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벼슬을 하사받는다. 이 일기는 선조 32년(1599) 2월 22일부터 같은 해 6월 27일까지 약 4개월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책의 앞뒤가 없어지고 글씨도 많이 훼손되어 읽기가 매우 힘들어 대체적인 정황만 알 수 있는데, 그가 죽은 후 200 여 년이 지나고 그의 7대 후손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노인의 시문과 함께 『금계집』속에 이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일기에는 명나라 소장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의 질문에 따라 한국의 교육, 과거, 재정, 군사, 문화, 풍속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준 것이 일기에 쓰여있어 시대상황과 정황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광주광역시>
좋아요 610
first
prev
1
2
3
1
/
3
next
l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