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경명소]
대인예술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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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 밤 열리는 별장 야시장은 이동식 가판대 에 전업 작가 , 아마 추어작가 들이 만든 독특한 상품들이 가득하다. 은을 가공해 만든 단 하나 의 액세서리, 고급스로운 생활 ...
매주 토요일 밤 열리는 별장 야시장은 이동식 가판대 에 전업 작가 , 아마 추어작가 들이 만든 독특한 상품들이 가득하다. 은을 가공해 만든 단 하나 의 액세서리, 고급스로운 생활 도자기 소품 , 수제 비누, 예술 도마 등 금속공예, 목공예,생활공예 , 그림 등 시장 가득 늘어서 있는 아트상점 들은 어디를 가든 눈길을 끈다. 금강산도 식후경에 걸맞은 맛있고 푸짐한 국밥과 마카로니 디저트, 천 원 짜리 국수, 녹두전과 문어 꼬치 등 퓨전 음식과 전통 먹거리가 함께 어울려 있어서 이를 맛보기 위한 사람들은 즐겁게 소곤 거리며 줄을 서 있다. “어여 들어와 보랑께” 라는 호객 소리조차 정겨운 예술 시장에서 연인과 함께, 아이들과 함께, 혹은 카메라만 달랑 들고 어슬렁거리는 초보 작가를 구경하는 것도 인간 냄새를 흠뻑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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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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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서원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奇大升)을 배향하였으며, 백우산 기슭 광곡(너브실) 마을에 있다. 기대승의 장남 기효증이 1607년(선조 40)에 아버지를 추모하여 지었으며 19...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奇大升)을 배향하였으며, 백우산 기슭 광곡(너브실) 마을에 있다. 기대승의 장남 기효증이 1607년(선조 40)에 아버지를 추모하여 지었으며 1938년 기대승의 후손에의해 이전·개축되었다. 월봉서원은 당초 고봉을 추모하기 위해 고봉 사후 7년 만인 1578년(선조11)에 낙암(현 신룡동)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고 동천(현 산월동)으로 옮겨서 건립했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1941년 현위치에 빙월당을 새로 지었다. 이어 1978년부터 사당과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의 건립에 착수, 1981년 모두 준공을 보았다. 빙월당의 당호는 정조가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빙월설월(氷月雪月)」의 뜻으로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빙월당이 자리 잡은 곳은 백우산 기슭 광곡(너브실)마을의 원 종가터인데 높다란 대지 위에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매우 풍치가 아름답고 경내도 조용하다. * 빙월당의 건물 * 빙월당은 후손에 의해 원래의 건물이 이전되거나 개축되었고, 또한 소실된 건물을 복원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후손에 의해 복원된 여러 건물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 사당(祠堂): 정면3칸, 측면2칸반의 팔작집, 정면 반칸은 퇴로 개방되어 있다. 41.98m² (건평 12.7평) - 강당(講堂):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양측 1칸씩은 모두 퇴간인데 전면과 우측 반칸에는 툇마루를 설치했다. 안쪽으로는 후면 반칸을 포함 좌측 2칸에 온돌방을 꾸미고, 우측 3칸에는 우물마루를 깐 대청을 꾸몄다. 84.29m²(건평 25.5평) - 장판각(藏板閣): 빙월당 우측에 있는 원래부터 있던 장판각과 좌측에 있는 새로 만든 장판각 2동이 있다. 본래의 것은 정면, 측면 모두 1칸 규모의 맞배집이며, 새 장판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2동의 건평은 도합 26.44m²(8평)이다. 새 장판각에 고봉집, 논사록, 왕복서, 이기왕복서 등의 목판 474매가 보존되어 있다. - 내삼문(內三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솟을삼문. 13.55m²(건평 4.1평) - 외삼문(外三門): 내삼문과 같은 솟을삼문. 12.56m²(건평 3.8평) 원래 월봉서원은 1655(효종6)에 사액되었고, 사우와 동제- 명성제, 서제 - 존성제, 강당 - 충신당이 갖추어졌는데 월봉서원의 액호는 이산로, 나머지 편액은 송준길이 썼던 것인데, 현판들은 현재 장판각에 보존되고 있다. *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 기대승 * 기대승(1527~1572)은 조선중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자는 명언, 호는 고봉이며, 시호는 문헌이다. 광주 소고룡리 송현동(현 광산구 신룡동)에서 성리학자인 기진의 2남으로 태어났다. 이퇴계와 김하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선학을 놀라게 하는 새 학설을 제시하여 존경을 받았다. 사단칠정을 주제로 한 왕복서한을 이퇴계와의 사이에 주고받은 이른바 사칠이기론은 너무도 유명하다. 1549년 사마시을 거쳐 1558년 문과에 급제, 1563년 사가독서를 받았고, 종사관, 집의, 전한, 우부승지를 역임했다. 1572년 대사간에 올랐으나 병으로 벼슬을 하직하고 귀행중 45세의 나이로 고부에서 별세했다. 종계변중의 진문을 써서 명나라에 보낸 공로로 1590년 광국공신 3등에 추록되고 덕원군에 봉해졌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소유자: 행주 기씨 문중 - 수량: 일원 - 규모: 사당, 빙월당, 장판각(2동), 내삼문, 외삼문 [문화재 정보] - 지정종목 :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 - 지정연도 : 1979년 8월 3일 - 시대: 조선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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