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가옥/근대건축]
고원희 가옥
좋아요 31
[전통가옥/근대건축]
고원희 가옥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옛 집터를 그 후손들이 여러차례 고쳐지은 집이다. 이 집은후손들이 여러 차례 고쳐 지은 집으로 현존 가옥은 191...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옛 집터를 그 후손들이 여러차례 고쳐지은 집이다. 이 집은후손들이 여러 차례 고쳐 지은 집으로 현존 가옥은 1917년 건축한 것이다. 예전에는 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현재는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 대문등이 남아있다. 대문은 정면 세칸 측면 한칸이다. 사랑채는 정면 네칸 측면 한칸으로 앞뒤로 마루가 있는 팔작 기와집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두벌대 기단위에 덤병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평면은 좌로부터 한칸의 방 3개와 한칸의 대청을 1단 높혀 누(樓)마루로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여섯칸, 측면 한칸에 전후좌우에 마루가 있는 팔작 기와집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외벌대 기단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앞열은 원형 그 외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원형 기둥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내부가구는 고주위에 대량을 걸치고 판대공을 놓았으며 구 위에 종도리를 놓았다. 평면은 좌로부터 한칸반의 부엌, 두칸의 대청, 한칸의 방으로 되어 있다. 창호는 전체가 양쪽으로 열어지는 문이며, 방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넉살창이 있다. 숭정기원후오갑정사윤이월초구일(崇禎紀元後五甲丁巳閏二月初九日)이라는 상량문에 글씨가 쓰여 있는데 이것으로 건립연대가 1917년임을 알수 있다. 사당은 고경명장군과 그 아들 종후, 인후 형제의 부조묘이다. 이 사당은 정면 세칸 측면 한칸으로 앞에만 마루가 있으며 맞배지붕이다. 외별대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현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첨자형의 포로 결합하였고, 초익공 위에는 용두를 빼내고 장혀와 굴도리를 얹었다. 내부가구는 대량위에 동자주를 얹고 종보를 걸친 뒤 그 위에 다시 판대공을 놓았으며, 겹처마에 조잡한 모조 단청을 하고 있다. 건립연대는 안채보다 빠른 시기로 추측된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좋아요 31
[전통가옥/근대건축]
박용철생가(용아생가)
좋아요 41
[전통가옥/근대건축]
박용철생가(용아생가)
이 곳은 우리나라 현대 문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초창기 시단을 빛낸 시인 용아 박용철(1904∼1938) 선생의 생가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새로운 문명을 소개하고 자주독립 정...
이 곳은 우리나라 현대 문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초창기 시단을 빛낸 시인 용아 박용철(1904∼1938) 선생의 생가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새로운 문명을 소개하고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용아의 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초가지붕을 시멘트 기와와 슬레이트 등으로 개량하였으나 1995년 문화재 복원 사업을 실시, 다시 초가지붕으로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다. 본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 등이 남아 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높다란 막돌 기단 위에 세웠다. 왼쪽은 부엌이며, 중앙 2칸은 방인데, 4개로 나누어 열리는 문을 갖고 있다. 나머지 2칸은 2개로 열리는 정자 살문이다. 사랑채도 5칸인데 오른쪽부터 부엌, 방, 마루의 차례로 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행랑채는 4칸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다. 이 집은 용아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해지나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박용철 선생은 광주 공립 보통학교와 서울의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동경 청산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김영랑과 사귀게 되었다. 졸업 후 다시 외국어학교 독문과에서 수학한 후 연희전문학교를 수학하고 고향에 돌아와 문학활동에 전념하였다. 김영랑, 정지용, 정인보, 변영로 등과 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문예월간」을 창간하여 외국문학을 소개하였다. 1931년에는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하여 창간호에 대표작인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등을 발간하였고, 극예술연구회의 동인으로 신극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외 시의 이론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문단은 프로문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는 김영랑 등과 함께 순수시 운동을 펼쳤다. 정렬적이고 남성적인 그의 시세계는 30년대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선생이 시를 통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곱게 바치려 한 것은 티끌없이 향 맑은 시혼의 순정 세계였다. 그러나 그는 1938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였다. 1939년 「박용철 전집」을 간행하였는데, 서두에는 그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가 실려 있다. 후에 그의 아름다운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후배들이 광주 공원에 시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좋아요 41
[전통가옥/근대건축]
오지호생가
좋아요 19
[전통가옥/근대건축]
오지호생가
이 곳은 서양화의 대가 오지호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근무 중이던 1954년부터 1982년 타계할 때까지 살던 집이다. 원래는 100여 년 전의 건축물이었으나 퇴락하자 198...
이 곳은 서양화의 대가 오지호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근무 중이던 1954년부터 1982년 타계할 때까지 살던 집이다. 원래는 100여 년 전의 건축물이었으나 퇴락하자 1986년에 전면적인 보수작업을 했다. 오지호(1905∼1982)는 인상주의의 회화 양식을 받아들여 토착화시킨 화가이다. 화순 동복 출신이며 휘문고보(徽文高普)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도일유학(渡日遊學) 유화가인 고의동(高義東)과 함께 있었으며 동경 미술학교에 유학했다. 1948년 광주에 내려와 정착하였고,「광주미술연구회」를 조직하는 한편 조선대학교 미술과 교수를 역임했다. 또「전남도전」의 창립과 더불어 지방 미술의 발전을 주도하며 서구상회화 우위의 개념과 이론으로 광주권 화단의 유화 화풍을 고착시켰고 만년에는 교과서에서 한자를 병용하여 과학적 두뇌를 개발할 것을 강조하는 한자 교육 부활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국전 초대 작가, 심사 위원, 운영 위원을 역임하였고, 예술원 회원을 역임하였다. 1977년 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하였으며, 1973년, 국민훈장 모란장(牧丹章)을 받았다. 오지호 가옥의 대문을 들어서면 화실로 사용되었던 채광창이 있는 문간채가 있다. 안채는 초가집인데 정면 4칸, 측면 1칸의 전후퇴집으로 우진각 지붕이다. 평면은 1칸 반의 부엌과 1칸씩의 방3개로 되어 있고, 배면에는 툇마루와 골방이 있다. 부엌에는 살창과 찬장을 복원했으며 판장으로 된 문은 옛날 것을 그대로 달았다. 부연은 대나무로 엮었고, 연목(椽木)은 가늘고 끝을 훑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 쌓기의 외벌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전면과 측면에는 네모기 둥, 뒷면에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현재의 기둥은 모서리 기둥만을 남기고 원래의 크기 대로 복원되어 있으며, 문은 외짝의 띠살문이다. 앞마루도 우물 마루를 살리기 위해 부분적으로 보수하였다. 방형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납도리를 결구하였고, 가구는 고주( 高柱)위에 대량을 걸친 뒤 동자주, 종량, 종도리를 차례로 올려놓은 일반적인 구조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화실은 6평 남짓한 크기로 북쪽으로 채광창이 있고, 장마루와 맞배지붕을 한 유럽 스타일의 화실이다. <출처 : 광주광역시>
좋아요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