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문화]
무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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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양서원
무양서원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자리 잡고 있다. 무양서원은 ‘무진의 볕’이라는 의미의 무진지양에서 연유한다. 무진은 광주의 옛 이름이다. 무진의‘무’와 볕의 한자어인‘양’이 ...
무양서원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자리 잡고 있다. 무양서원은 ‘무진의 볕’이라는 의미의 무진지양에서 연유한다. 무진은 광주의 옛 이름이다. 무진의‘무’와 볕의 한자어인‘양’이 만나 무양이 되었다. 이렇게 무양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에는 서원의 기능을 보다 폭넓게 하려는 유림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원래 서원은 명현에게 제사를 모시고 후학들에게 교육 시키는 곳이다. 서당이나 향교처럼 교육기관은 아니면서도 그 이상의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바로 서원이라 할 수 있다. 무양서원 역시 명현을 제사하는 사당과 교육을 담당하는 재의 역할을 겸하는 곳이었다. 무양서원은 1927년 탐진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세운 곳이다. 여기에는 고려 인종 때의 명신 장경공 최사전을 비롯하여 그의 후손인 손암 최윤덕, 금남 최부와 문절공 유희춘, 충렬공 나덕헌 등 다섯 분을 모시고 있다. 배향된 인물 중 주벽인 장경공 최사전은 인종 때 어의였다. 소부소감을 지낸 명신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에 함께 모셔진 인물이다. 손암 최윤덕은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불출하면서 벼슬을 물리친다는 이유로 끝내 광산으로 귀양을 떠났다. 귀양지에서 손암은 후손들에게 벼슬하지 말 것, 집안에 사당을 세우지 말 것, 토지를 많이 두지 말 것 등 선비로서의 자세를 가르쳤다. 금남 최부는 성종 때 사람으로 동국통감을 편수하였으며, <표해록>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부친상을 듣고 제주에서 돌아오던 중 명나라로 표류하였다가 훗날 귀국하여 지은 글이 <표해록>이다. 문절공 유희춘은 금남 최부의 외손이며 <미암일기>를 남겼다. 충렬공 나덕헌 역시 금남의 외손으로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운 인물이다. 다섯 인물을 배향하고 있는 무양서원.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고풍스러운 건물이 마주 보인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다. 강당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택당의 좌우로 합의문과 합인문이 있는데, 합인문이 일반적으로 출입하는 문이다. 합의문을 지나면 오른쪽에는 동재인 성지재가 있고, 왼쪽에는 서재인 낙호재가 있다. 높은 대지 위에는 담장을 돌린 무양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내삼문인 삼오문은 사우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삼오문 좌측과 우측 문짝 위에 특이한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귀면 때문인지 서원을 들고날 때면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은근하다. 이곳은 서원 외에도 정자와 넓은 광장, 주차장 등 편의시설이 고루 갖춰져 있다. 뿐만 아니라, 서원 주변에 우뚝우뚝 솟아 있는 아름드리 거목들은 꿋꿋한 기상을 지닌 유림들처럼 말없이 그 위세를 자랑하고 있다. 지금은 이곳을 찾는 지역민들의 휴식공간으로도 널리 애용되고 있는 곳이다. 광주광역시에서는 1987년 무양서원을 지방문화재 자료 3호로 지정하였다. 무양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9월 6일에 제향을 하므로 서원과 그 제례에 관하여 자세하게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이 날을 택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출처 : 광주관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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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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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천사
1924년에 건립된 충주지씨들의 서원이자 사우이다. 일제강점기 때 충주지씨들이 호국선현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고려 말 충신 정몽주(鄭夢周), 고려 말 공신 지용기(池湧奇...
1924년에 건립된 충주지씨들의 서원이자 사우이다. 일제강점기 때 충주지씨들이 호국선현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고려 말 충신 정몽주(鄭夢周), 고려 말 공신 지용기(池湧奇), 조선조 공신 정충신(鄭忠信), 병자호란 때 활약한 지여해(池汝海)·지계최(池繼凗) 등 5인을 향사하여 왔는데, 1924년 지응현(池應鉉)이 이들을 배향하고 영정을 봉안하는 서원을 지었다. 병천사는 1927년 건축공사를 시작하여 1932년에 완공되었는데. ‘천리(天理)를 병집(秉執)한다’는 뜻에서 ‘秉天祠’라 하며 서원의 역할을 겸하였다. 건립 초기의 입지형태는 문중 소유의 「병천사산도(秉天祠山圖)」에 잘 나타나 있다. 앞뒤의 죽림과 연못을 배경으로 신문 1동과 병천사 현전 1동, 영당 1동, 존심당 1동, 동재 1동, 서재 1동, 거경재 1동이 자리 잡고 있다. 사우는 건좌손향축을 중심으로, 위쪽에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역과 아래쪽에 교육하는 강학역을 두어 전학후묘의 기본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사묘역은 병천사 현전을 중심으로 앞에 신문이 자리잡고, 신문 앞에는 사적비와 묘력비가 있다. 현전 오른쪽에는 영당과 문이 현전과 나란히 위치한다. 강학역은 동재인 숭인재와 서재인 집의재가 좌우에 자리잡고, 병천사와 마주보며 강당인 존심당이 위치하며, 존심당 오른편에는 사우의 대문격인 광제문이 있다. 병천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후툇간을 두고 있으며, 간살 없이 통간을 제향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5량가구를 얹고 방풍판을 단 고기와의 팔작집으로 내일출목으로 3익공포를 두고 있으며, 외부 의장물에는 긋기단청, 내부에는 금단청을 위주로 하고 있다. [문화재지정] - 지정종목 :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 지정연도 : 1979년 8월 3일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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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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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정
광주지역 향약이 처음 시행된 곳, 부용정 부용정은 고려말 조선초에 활동한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 지은 정자로 평야가 펼쳐져 있는 평지에 2단으로 대지를 고른 후 건립...
광주지역 향약이 처음 시행된 곳, 부용정 부용정은 고려말 조선초에 활동한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 지은 정자로 평야가 펼쳐져 있는 평지에 2단으로 대지를 고른 후 건립되었다. 정자의 이름은 연을 꽃 중의 군자)라고 칭송하였던 북송 주돈이의 애련설에 담긴 뜻을 취하여 지었다. 이 정자는 광주지역 향약의 시행장소로 매우 유서가 깊은 곳이다. 또한 그는 이곳에서 이시원(李始元), 노자정(盧自亭) 등과 학문을 논하고 시를 읊기도 하였다. 건물은 정·측면 다같이 3칸으로 기둥머리에 공포가 없는 민도리집이다. 우물마루를 깐 맞배지붕으로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홑처마이다. 기단은 네모 막돌 바른층 쌓기를 하였으며, 좌우 가운데를 제외하고는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았다.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을 하였고 연골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였다. 이곳에는 부용정 현판과 양응정(梁應鼎), 고경명(高敬命), 이안눌(李安訥), 박제형(朴濟珩) 등 후대 명유(名儒)들의 누정제영(樓亭題詠)을 새긴 편액이 많이 걸려 있다. 정자 주변에는 칠석마을 고싸움놀이(국가무형문화재) 전수관과 부용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기념물)가 있고, 부용정의 내력이 쓰인 부용정석비(芙蓉亭石碑 1984년 건립)가 있다. * 풍속 교화에 힘쓴 김문발 * 김문발은 본관은 광산, 호가 부용(芙蓉)으로 고려말 조선초에 왜적을 물리친 공이 매우 크며 전라감사, 황해도관찰사,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418년(태종 18년) 낙향하여 여씨의 남전향약과 주자의 백록동규약을 모방하여 풍속 교화에 힘썼는데, 이것이 광주 향약좌목의 유래가 되었다. [문화재 정보] - 지정종목 :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3호 - 지정연도 : 1990년 11월 15일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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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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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
신에게 제를 올리던 곳으로 갑오년(1984) 이후 광주의 여제와 함께 폐지되었으며, 한말에는 사직단을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동물원이 들어서면서 그 자취가 없어졌는데,...
신에게 제를 올리던 곳으로 갑오년(1984) 이후 광주의 여제와 함께 폐지되었으며, 한말에는 사직단을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동물원이 들어서면서 그 자취가 없어졌는데, 1993년 광주시가 사직단을 복원, 1994년 광주 향우회 회장(최기영)에 의해 1백년 만에 사직제가 부활되었다. 사직단은 국토의 신과 오곡의 신, 두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다. 국토와 오곡은 민생의 근본이므로 삼국 시대부터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사직단을 설치하여 친히 왕이 나가서 제사를 올렸다. 지방에서는 성주가 제주가 되었으므로 광주 목사가 매년 제사를 주관하였다. 사직단은 종묘와 함께 신성시되어 종사(宗社)라고도 했다. 사직제는 매년 맹춘(정월) 상신일에 기고제(그해 풍년을 비는 제), 중춘(음력6월), 중추(음력 8월) 상무일, 납일(음력 12월 8일)걸쳐, 네 차례 거행되었으며, 가뭄에는 기우제, 비가 많이 오면 '기정제', 눈이 오지 에 않으면 '기설제'를 지냈다. 또한 사직제는 혈제(血祭)라 하여 제수에 돼지머리나 양머리를 날것으로 봉헌했다. * 사직단이 있는 사직공원에 대하여 * 사직공원의 터는 원래 사직단이 있던 곳이다. 1894년 제사가 폐지되고 1960년대 말에 사직동물원이 들어서면서 사직단은 헐리고 말았다. 그 뒤 사직단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자 1991년 동물원을 우치공원으로 옮기고 사직단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직공원은 각종 수목 및 화초들의 조경이 잘 되어 있으며 특히 매년 4월 15일을 전후해서 벚꽃이 만발, 광주시는 이 무렵이면 밤에 전등을 가설하여 시민들이 밤에도 벚꽃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지금은 시민들이 가장 즐겨찾는 휴식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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