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 장군
광주 포충사


조선시대 동래부사로 마지막 벼슬을 하시고
고향인 광주로 돌아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신 고경명 장군 그분을 만나러
부산광역시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광주광역시로 향합니다.

<1558년 문과에 1등으로 급제한 고경명에게 내린 교지>
1533년 광주시 광산구 압보촌에서 출생한 고경명은
스무 살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영암군수, 홍문관 교리, 서산군수, 춘추관 편수관 등
관직을 두루 거친 후 59세에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고향에 내려옵니다.


조선시대에는 말을 타고 갔을 테지만
오늘은 자동차를 타고 그 길을 따라가 봅니다.
어느덧 곡성기차마을휴게소에 도착하여 한 잔의 커피를 마셔봅니다.
우리 후손들이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만든 근본은
바로 의병들의 피 흘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잊지 않고
광주로 다시 출바알 ~

도착한 곳은 바로바로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광목간 도로변에 있는
호남의 대표적 호국선열 유적지로 꾸며진 사우 포충사입니다.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는 포충사는 입구의 표지석부터 남달라 보입니다.


외삼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전시관이 있으며
내삼문과 사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연못이 있는데 현재 경내는 크게 구사우 와
신사우지역으로 분리되어 있어요.
구사우로 가다 보면 홍살문이 있고
그 옆에 자연석으로 된 비석이 있어 눈길이 갑니다.

이 비석의 이름은 충노비이며 봉이와 귀인은 집안 하인으로서
의병활동을 하는 주인을 따라 의병활동을 하다
주인과 함게 순직한 노비를 위해 비를 세웠습니다.

홍살문을 지나 구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운치가 있으며
키 큰 소나무들은 마치 봉제 고경명에게 예의를 갖추듯
허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구사당 외삼문이며
지방기념물 제7호이며 1974년 5월 22일 지정되었습니다.

포충사는 1865년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정리할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폐쇄되지 않았던
전라남도 지방의 2대 서원 가운데 하나로도 유명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원은 없어지고 사당만 남아있어요.

구사우에서 바라본 신사우의 모습은
정돈이 잘되어 안정감이 있어 보입니다.

신사우로 향하여 봅니다.
신사우로 가는 길은 길 양옆으로 단풍나무가 자라고 있어
가을철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고 합니다.
6월의 포충사도 좋지만 가을의 포충사를 보러 다시 와야겠어요 ~


내삼문을 지나 사당으로 들어가 보니
어디선가 고경명 장군의 음성이 들려오는듯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노후에도 불구하고
종후 인후 두 아들과 함께 의병들을 모집합니다.

<창의 거병도>
고경명의 간절한 호소에 한 달 만에 의병 7천여 명이 모였으며
왜군이 전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첩보를 듣고
고경명은 휘하의 유팽로 안영 등과 함께
호남의 길목을 지키기 위해 금산으로가 방어진을 폅니다.

<구국 출병도>
관군은 북문을 맡게 하고 고경명은 의병들을 이끌고
서문을 치기로 하지만 조총을 앞세운 적의 화력에
날이 갈수록 아군은 불리해져 갔습니다.

<금산구국혈전도>
고경명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길을 열고 의병들을 뒤따르게 합니다.
그러나 정보소통의 부재로 병력이 합세하지 못하게 되고
고경명 장군은 왜적에게 포위되고 맙니다.
이에 유팽로와 안영은 고경명 장군을 구하러 적진에 뛰어듭니다
그러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고경명과 고인후,
그리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나선 유팽로 안영은 장렬히 전사하고 맙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게 참패하고
둘째 아들 고인후와 함께 전장에서 숨을 거둔 고경명
그러나 고경명의 죽음은
그 이후에 승리를 위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고경명의 죽음이 불러온 또 하나의 역사
많은 전라도 선비들이 이제는 우리가 의병을 일으켜서
고경명 선생이 못다 한 이 땅을 지켜야겠다면서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납니다.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는 다시 의병을 일으켰고
능주에서는 최경회가 전라우의병을
보성에서는 임계영이 전라좌의병을
남원에서는 변사정을 주축으로 의병들이 일어납니다.

고종후 또한 후에 진주에서 왜군들과 싸우다가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합니다.
고경명과 그의 아들 고종후, 고인후, 그리고 휘하의 유팽로, 안영의 피가
의병운동에 불을 지펴 호남과 조선 땅은 지켜졌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정국이 안정되자
1601년 호남 지방의 유생들이 왜란 때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제향하기 위한 사당으로 제봉산 아래에 세운 것이 포충사입니다.
이어 1603년 박지호와 후손들이 임금에게 사액을 청하여
포충이라는 이름과 편액을 받았습니다.

광주 포충사를 돌아보며 나라가 전쟁에 휩싸였을 때
자신의 안녕보다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던
고경명 장군을 비롯한 의병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금 나라사랑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며
다시는 외세의 침략을 당하지 않도록 모두가 힘을 합쳐
아니라 이 땅을 아끼고 사랑해야겠습니다.

포충사 위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