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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 문화재]
(전) 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
좋아요 1350
[국가지정 문화재]
(전) 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
광주천변에 위치한 광주공원은 성거산(聖居山)이라 불리웠다. 여기에 성거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절에 있던 5층 석탑이라 하여 전 성거사지 오층석탑이라 명했다. 고려시대에 세... 광주천변에 위치한 광주공원은 성거산(聖居山)이라 불리웠다. 여기에 성거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절에 있던 5층 석탑이라 하여 전 성거사지 오층석탑이라 명했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의 아랫부분은 단층이며, 이 위에 2단으로 나누어 5개의 돌을 맞추고 있다. 이는 이전에 볼 수 없던 고려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특색이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각 귀퉁이는 모두 약간씩 치켜 올려져 있다. 1961년에 석탑을 다시 고쳐 세울 때 2층 탑신에서 금동으로 만든 집 모양의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이 석탑과 관련하여 이야기 하나가 전해지고 있다. 성거산의 모양이 거북이처럼 생겨 지명도 구동(龜洞)으로 불리운다. 그런데 거북이가 광주를 떠나는 방향으로 가는 형세여서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거북의 등 위치에 성거사를 세우고 거북의 목 부근에는 5층석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당초에 석탑은 꼬리부분에 세우려 했으나 몇 번이고 무너지자 지나가는 승려가 움직이는 꼬리에 세우려하니 무너지는 것이라며 움직이지 못하게 목에 세워야 한다고 해서 현재의 자리에 세워졌다 한다. <출처 :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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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 문화재]
광주 자운사 목조아미타래여좌상 및 복장유물
좋아요 296
[국가지정 문화재]
광주 자운사 목조아미타래여좌상 및 복장유물
이 불상은 복장품에서 1388년 중수개금한 내용의 기문이 밝혀져 그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재료의 특성상 목제가 오랫동안 전래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고... 이 불상은 복장품에서 1388년 중수개금한 내용의 기문이 밝혀져 그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재료의 특성상 목제가 오랫동안 전래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고려시대에 조성된 목조 불상으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1276년에 제작된 개운사 목조 아미타불좌상을 비롯하여 수국사 목조아미타불좌상,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등 대체로 12세기 말에 제작되었다고 생각되는 일련의 목불좌상들과 같은 계열의 불상이다. 자운사의 복장전적은 대수구다라니(大隨求陀羅尼) 및 주금강경(注金剛經) 등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의미 있는 자료가 다수 있으며, 함께 발견된 복장조성기에 의해 복장이 조성된 절대연대가 확실하여 서지학 분야의 판본 연구는 물론, 불교학의 내용 연구와 미술사의 도상(圖像)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 복장 유물로 평가된다. 또한 섬유류의 유물이 존속하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기후·환경 조건 등을 고려할 때 자운사 복장직물의 역사적·민속적 가치가 크다. 1611년에 내장된 후령통(候鈴筒)과 팔엽연화(八葉蓮花), 오보병(五寶甁)도 일괄 부속품으로 함께 지정한다. <출처 :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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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 문화재]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
좋아요 397
[국가지정 문화재]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
광주광역시내에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2기의 탑 가운데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탑이 서있는 부근은 백주사(栢州寺)터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추정할 ... 광주광역시내에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2기의 탑 가운데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탑이 서있는 부근은 백주사(栢州寺)터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추정할 만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탑의 구성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형태로 신라석탑의 기본형을 잃지 않고 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는 여러 개의 돌을 짜맞추어 구성하였으며,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특히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1층은 5단인데 비해 2층부터는 4단으로 간략화되어, 양식상 만들어진 시대가 통일신라 후기로 내려옴을 알 수 있다. 1955년 해체, 수리할 때 4층 지붕돌 윗면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고 1961년에 다시 수리를 하여 일부 석재를 보완하였다. 광주 전남지방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5층석탑 가운데서도 우수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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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 문화재]
무등산 주상절리대
좋아요 1373
[국가지정 문화재]
무등산 주상절리대
무등산 주상절리대는 중생대 백악기에 발생한 화산활동의 산물로서 용암이 냉각, 수축하면서 형성되었으며, 오랜 세월 풍화에 의해 기둥모양 또는 병풍모양을 하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 무등산 주상절리대는 중생대 백악기에 발생한 화산활동의 산물로서 용암이 냉각, 수축하면서 형성되었으며, 오랜 세월 풍화에 의해 기둥모양 또는 병풍모양을 하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주상절리대는 입석대와 서석대 그리고 규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석대와 서석대의 돌기둥 하나의 크기가 지금까지 남한에서 보고된 것 중 최대의 것으로 주목 받고 있다. 특히 주변의 수목 및 무등산과 어울려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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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 문화재]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좋아요 148
[국가지정 문화재]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 증심사로 옮겨 온 것이다. 현재 광배(光背)와 대좌(...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 증심사로 옮겨 온 것이다. 현재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잃어버렸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 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높고 뚜렷하다. 눈·코·입 등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어서 온화하고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해준다. 전체적으로 신체는 두꺼운 옷에 싸여 있어서 굴곡이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무릎 너비와 적절한 비례를 이루고 있어서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가슴을 넓게 드러내고 있으며, 양 팔에 걸쳐진 두꺼운 옷자락은 규칙적인 평행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손 모양은 왼손이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쥔 형태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형식과는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에서 볼 때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통일된 균형미를 보이는 점이 우수하게 평가되며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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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문화]
환벽당 일원
좋아요 463
[선비문화]
환벽당 일원
가사문학관에서 자미탄 다리를 건너면 왼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잠시 조선 중기 시대로 돌아가는 듯싶은 숲길이 예사롭지 않다. 제법 가파른 층계가 잠시 멈춰 서서 숨... 가사문학관에서 자미탄 다리를 건너면 왼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잠시 조선 중기 시대로 돌아가는 듯싶은 숲길이 예사롭지 않다. 제법 가파른 층계가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게 한다. 뒤를 돌아 바라보니 분지 속에 들어앉은 듯 능선이 가지런하고 지실 마을도 평화롭다. 고요하고 한가로움이 세상의 온갖 번민을 다 씻어내는 듯하다. 환벽당 가는 길은 이처럼 은근하고 수줍은 색시마냥 숨어 있는 품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나주 목사를 지내고 향리에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던 사촌 김윤제는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환벽당이란 ‘푸르름을 사방에 둘렀다.’라는 뜻이다. 당호에 걸맞게 풍광이 아름답다. 정자 뒤편으로는 대밭이 울울창창하다. 그 옛날에는 푸른 대숲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자취도 없고 늙은 배롱나무만 기웃이 서 있는 게 인상적이다. 노송 몇 그루는 용비늘도 선명한 고목이다. 실히 몇 백 년은 살았음직한 나무가 경이를 넘어 외경심까지 자아내게 한다. 안개에다 구름 기운 겹쳐졌는데 / 거문고와 물소리 섞여 들리네 노을 사양길에 취객 태워 돌아가는지 / 모래가의 죽여 소리 울리고 있네 환벽당에 걸려있는 이 시는 임억령의 ‘환벽당’이라는 시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환벽당에 모여 교유하며, 환벽당에 관한 시를 쓰며 술잔을 나누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사촌 김윤제는 술 마시고 거문고를 타며 자연에 취하여 사는 생활을 즐겼다고 하니 마음과 뜻이 맞는 친구들을 불러 유유자적함이 어떠했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아 송강 정철이나 서하당 김성원 같은 제자를 낳았으니 가히 가사문학의 산실로도 환벽당은 손색이 없다. 환벽당은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으로도 유명하다. 어느 날 김윤제가 낮잠을 자다가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이 예사롭지 않아 조대로 내려가 보니 비범한 용모의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소년은 화순 동복에 있는 누이를 찾아가는 소년 정철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정철은 스물일곱 살,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십여 년간을 김윤제를 비롯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촌 양응정 같은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 학자들을 스승으로 만나 학문과 시를 배우게 된다. 송강이 가사문학의 꽃을 피우게 된 배경에는 이처럼 훌륭한 학자들과 스승들이 있었던 것이다. 훗날 김윤제는 그의 외손녀와 정철을 혼인시킨다. 전망 좋은 환벽당을 뒤로 하고 다시 돌층계를 내려서면 바로 조대쌍송을 향해 열려 있는 대문이 있다. 이미 거목이 돼버린 소나무와 조대의 바위는 지금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에 익다. 조대 아래 창계의 물은 소를 이루고 예전에는 뱃놀이도 행해졌다고 하니 물고기도 실하게 잡혔을 법하다. 쌍송을 사이에 두고 정철의 시비가 길손의 발목을 붙든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누대의 세월이 흘러도 선비의 푸른 기상은 살아남아 현대인들은 조상의 자취를 찾아 원근 각지에서 모여 든다. <출처 : 광주관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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